


제가 만든 커피 가치 평가 어플리케이션, “커피가치 평가할래?” 에 대한 제작기입니다. 어플은 위 링크에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커피 산업의 어떤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 앱을 개발했나요?
문제설정! 문제설정과 시장조사는 제품 개발 이전에 정말 중요한 부분이죠. 물론 답할 수 있어야 하며, 앞으로의 브랜딩과 마케팅, 업데이트 방향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입니다.
네, 그런거 따윈 없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때로는 문제 해결이 아닌,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프로젝트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끝까지 순수한 동기만을 가져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만큼 제가 어립니다
프로그래밍만 열심히 할 뿐, 집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않고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우연히 커피를 하는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났고, 다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좋은 사람이 커피를 좋아하기에 시작한 커피는 어느새 제가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코딩하러 가는 것이 일상이 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카페에서 바리스타와 로스터들이 여러 커피인들과 어우러져 수십 잔의 커피를 맛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로지 커피의 맛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다가도 오가는 사람 사는 일들과 감사한 일들, 힘든 일들과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은 저에겐 너무나 새로운 장면이었습니다.

네, 커핑이라는 문화를 처음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화는, 바로 구매 결정이었습니다. 알고보니 결국 이 커피를 살 것이냐, 저 커피를 살 것이냐 라는 문제가 사실 커핑의 목적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저 커피를 같이 맛보고 소소한 대화를 나눌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그들이 논하는 커피의 맛과 생산적인 대화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커피인들을 나도 과학적인 접근과 프로그래밍으로 돕겠다!
큰 포부를 밝히고 시작한 겨울녹 연구소는, 과연 그들의 일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그저 “나도 껴줘!” 라는 어린 아이의 마음이었을까요.
시간이 흐르고, 커피도 프로그래밍도 저도 변했습니다
프로그래머가 어느새 유망 직종이 되었듯, 커피도, 그리고 저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느덧 커피와 과학, 그리고 프로그래밍과 3D프린팅을 엮어 커피계의 의문점들을 과학으로 푸는 일들에 익숙해졌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방안에 틀어박혀 있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저의 작품들을 열정적으로 홍보했습니다.

그때 등장한 Speciality Coffee Association 협회의 Coffee Value Assessment는, 커핑을 보다 체계적으로, 과학적으로, 통계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공식적인 양식을 만드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저는 시간이 흘러도, 커피의 맛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접근과의 융합 이전에 맛에 대한 평가를 자유자재로 해내는 스스로가 상상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커피에서 물리적인 수치 (농도, 추출 속도 등) 를 측정하는 실험은 여럿 해보았지만, A커피가 왜 B커피와 맛이 다른지 에 대한 접근에서는 논리적인 주장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제게는 바리스타의 피가 흐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등장한 CVA는 제게 과학이라는 창으로 커피의 물리적인 부분과 맛적인 부분을 모두 설명해낼 수 있겠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저는 결국 CVA를 어플리케이션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종이가 아닌 어플로 이 좋은 양식을 쓰도록 만들겠다는 거친 포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좋은 만남이 있었네요! 어찌됬든 그럼, 이 어플의 제작 목표는 커피와 과학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군요.
그런데… 오직 그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를 응원해 주시는 분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개발 초기의 제 어플의 모습을 보시겠나요? 저는 처음에는 CVA 양식을 최대한 어플로 배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거기에 커피 별로 간단한 통계를 넣고, 나름대로 추가적인 기능이라고 생각했던 “시간 돌려보기” 기능정도를 넣었죠.

초기버전이 완성된 후, 저는 보게 되었습니다. 원본 CVA 양식에서, 체크하는 부분부분들 보다 빈 여백이 더 많다는 것을요. 그토록 규격화와 통계에 힘쓰던 양식은 알고보니 여전히 평가자의 주관적 평가와 느낌을 존중하고 있었습니다. 제 앱에는 그런 공간따위는 없었죠.
결국 앱은 앱이고, 종이는 종이였던 것입이다. 어플, 프로그램의 양식을 따르는 이상, 모든 부분이 규격화되어야 하고 자유롭게 사용자가 만질 수 있는 부분은 당연히 종이 양식보다는 훨씬 없어지겠죠. (그렇다고 거대한 텍스트 입력란을 만든다고 사람들이 좋아해줄 리도 만무하고요)
여러모로 부족한 어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분들이 다양한 피드백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나의 프로젝트에 주어진 관심과 응원, 그리고 도움이라는 것에, 저는 정말로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개발자인 제가 아니고, 사람들이 이 앱에 원하는 것 이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저를 응원해주는 커피 센서리 전문가분들을 생각했습니다. 나를 응원해주는 전문가분들도, 나처럼 CVA 배낀 어플 을 원할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제 앱을 새로운 커핑 어플 로서 생각할 것 같았습니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혹시나 이 앱이 커피의 가치를 평가하는 더 나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지금 현재 어플의 모습은 당장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의 기대와도 먼 모습인 것이었죠.
어떻게 해야 규격화된 양식 안에서, 최대한의 맛에 대한 표현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요?

맛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입니다. 그만큼, 평가자가 적어도 그 평가를 한 자신만의 이유가 명확하게 있다고 생각이 들어야, 음식을 만든 요리사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가령, 제가 내린 커피에 대해 누군가가 9점 만점에 8점을 주었다고 해봅시다. 저는 물어볼 수 있습니다. “왜 제가 9점을 못받았죠?” 그에 대한 답이, 단순히 좋았기 때문에 8점정도 주었다 였던 거라면, 저는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평가자는 제 커피에서 어떤 맛을 느꼈고, 그 맛이 어떤 측면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는지를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힘든 과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어플에서는 커피의 여러 측면에 점수를 주도록 되어 있는 한편, 점수를 준 이유를 글로 풀어서 장황하게 적으라고 강제하지 않습니다. 대신, “보조 점수” 를 추가하도록 합니다. 가령 8/9 라는 점수에 대해서,
라는 평가를,
으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합리적으로 근거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다양한 맛 표현 데이터베이스(향미 사전) 중에서 하나를 골라 더할 수도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사용자는 꽃차 선택 > “우아한 느낌” 기입 > 보조점수 9점 추가 와 같이, 거의 글자 타이핑이 아닌 터치만을 이용해서 자신의 점수에 대한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엔 커피 평가에서 생기는 문제점을 찾고, 재밌는 방식으로 해결하셨네요. 사용자 분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나요?
바로 그 부분이, 제가 멈춰있는 부분입니다.
어플의 개발 방향성에 대해서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앱 개발에 매진하면 사람들이 알아주겠지, 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 내심, 사람들을 위해서 어플을 개발하고 있으니 당연히 써줄 사람들은 써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수차례 업데이트를 거듭해도 오히려 신규 유저 유입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기능을 더 추가해야 사람들이 기뻐할까? 가 아니라, 왜 이 기능들을 사람들이 좋아해주지 않았을까? 라는 성찰을 해야 할 때가 와버린 겁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사용자 집단의 설정이었습니다. 제 어플의 사용자 집단은 “커피를 분석하는 새로운 방법에 관심이 있고, SCA의 CVA 도구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는, 커피 전문가 집단” 으로 한정되었습니다. 이미, 커피 전문가는 자신만의 평가 방식이 머릿속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혁신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제 어플에 무조건적인 관심을 가져주실 수는 없겠죠. 커피를 분석하는 새로운 방법에 관심만 있어도 안됩니다. 이 어플이 기반으로 하는 CVA 라는 도구는 과학적이고 통계적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커피 전문가들도 배우고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복잡한 평가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커피에 대한 실력과 새로운 평가방식에 대한 갈망이 동시에 있는 사람만이 이 어플에 관심을 가지는 이용층이 되어버립니다.
CVA가 좋아서 시작된 프로젝트는, 이제 CVA에서 탈피해내지 않고서는 살아남기가 힘든 프로젝트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더이상 저만의 프로젝트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앱 개발에 손을 대기 시작한 시점부터 거의 반년간 미친듯이 시간을 갈아넣었습니다. 과연 저는 무엇을 위해서 이 시간, 다른 프로젝트로 갈 수도 있었던 기회비용, 온갖 고민들을 떠올려야 했던 심적인 부담감을 안고갔을까요? 어플을 응원해주시는 분들을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서 일까요? 앱을 제작하고 배포하고 서비스하는 일은, 절대로 혼자서 레고블록 작품 만들듯 할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만들고 배포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타인의 관심이 필요하게 되고,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문제를 느끼는 부분이 무엇인가 생각해야 하게 됩니다. 큰 고민을 상시 머릿속에서 하게 되고, 프로젝트의 미래를 계속해서 그려나가야 하는 압박감이 생깁니다.
무언가를 창작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은, 결국 미래에 고뇌할 나 자신과, 또한 제가 영향을 미칠 많은 사람들을 책임지겠다는 - 물론 혼자서만 쓰고 말겠다면 아무 상관이 없지만요! - 무거운 결단입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계획인가요?
개발 과정 중 정말 많은 것을 느꼈고, 개발 내 · 외적으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저는 애초부터 지나치게 가벼운 마음으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더이상 “내가 CVA 어플을 쓰고싶어서” 라는 얇은 다짐으로는 이 프로젝트의 조타실에 설 수 없습니다. 정말로 커피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려해야 합니다. 애초에 “커핑” 어플일 필요가 있는 것인지부터 근본적인 의문을 품어야 합니다.
아마도 그런 큰 결단을 내릴 때 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저는 느리지만 뚝심있게, 꾸준히 이 프로젝트를 몰고 나아가려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커피를 좋아하는 소비자들과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주시는 업계인분들께 재밌는 변화를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작은 파란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로젝트의 진행 방향이 어떻게 바뀌어 나가건, 그 부분만큼은 확실합니다. 저는 제 삶을 바꿔준 커피와 커피인들에게 꼭 보답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제 서비스를 지금껏 사용해주신 유저 분들께도 꼭 마음에 쏙 드는 어플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마치며
이 프로젝트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지금도 양 스토어에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가 이뤄지고 있으며, 베타테스터 오픈 카카오톡도 운영중입니다.
CVA 어플인데 정작 CVA에 대한 설명을 이 포스팅에서는 그렇게 많이 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조만간 CVA에 대해서 재미있게 풀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어플을 도와주신 익명의 많은 이용자 분들과 베타테스터 여러분, 개발에 직접적으로 큰 조언을 주신 다양한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특히 커피파인더에서 어플을 사용하면서 오가는 커피인들을 붙잡고 많은 조언을 구했던 것 같습니다. 공간을 운영해주시는
대표님과 커피파인더 크루 분들은 프로젝트를 떠나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혹시 제주도로 여행을 오신다면, 커핑 어플 개발자의 명예를 걸고
당당하게 한번쯤 들려보시라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개발은 이렇게 깊고 재밌는 분야입니다. 다함께 코딩을 합시다.
나의 꿈을 모두가 같이 꾸어주는 동상이몽의 세계로, 저와 같이 떠나보시는 것은 어떤가요?”
저는 앞으로도 winter.sci.dev에 저의 개발 이야기와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